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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번역/기사/칼럼

쉴라 제프리스가 꾸미기 관행과 여성혐오에 대해 말하다

by Casey Choi 2018. 1. 23.

원저자: Sheila Jeffreys 

역자: Team Hermes 김구쨔

편집: Team Hermes 남혜리

원제: Sheila Jeffreys speaks on beauty practices and misogyny

원문 출처: http://feminist-reprise.org/library/appearance-and-beauty-practices/sheila-jeffreys-speaks-on-beauty-practices-and-misogyny/



본 연설문은 2006년 4월 7일에 안드레아 드워킨 기념 컨퍼런스에서 쉴라 제프리스가 했던 연설입니다. 원고는 다른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제공하였습니다. (현재 블로그는 삭제됨)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이 자리, 안드레아 드워킨 기념행사에 초청되어 매우 기쁘군요. 그녀의 정치적 견해와 글은 제 삶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사실, 작년에 멜버른에서 우리는 제 연속 세미나에서 소규모의 기념행사를 했습니다. 35명의 여성들이 그녀의 여러 책을 읽고 그 책들이 얼마나 의미있었는지 말하기 위해 모였으며, 우리는 그 자리에서 클레어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삶이 망가졌는지, 안드레아 드워킨의 저작을 읽는 게 어떻게 학대나 기타 폭력을 당한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는지에 대한 여성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는 그날 저녁 세미나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제 작품들은 대부분 포르노에 관한 것이었고, 이제는 성매매,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매매에 대항하는 글을 씁니다. 따라서 포르노에 대한 안드레아의 작품은 제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1977년 런던에서 저는 영국 최초의 반포르노 단체인 <런던 혁명적 페미니스트 반포르노그래피 의식고양 단체>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네, 말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지요! 하지만 당시 저는 1980년 <여성폭력에 대항하는 런던 여성>본부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저는 포르노에 대한 안드레아 드워킨의 저서를 찾아보았고  그 책은 제게 대단히 중요했지요.


하지만 오늘 생각하건대, 많은 사람들이 안드레아의 포르노에 관한 저작을 다룰 것이므로, 저는 살짝 다른 걸 해보고자 합니다. 그녀의 초창기 작품들 중 두 편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는 1974년에 출간된 첫 작품, 『여성 혐오』(Women Hating)입니다. 그녀는 그 책을 쓰기 전 수년간 글을 써왔어요. 출간 당시 그녀가 27세였으니 확실히 초기작이고, 그 나이에 그 정도 책을 썼다는 걸 생각한다면 엄청난 명작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 책을 살펴보고, 작년에 나온  『아름다움과 여성혐오』(Beauty and Misogyny)를 집필하는 데 그 책이 얼마나 영감을 주었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내용은 제게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1977년에 나온 『우익 여성』(Right Wing Women)도 제가 봤을때 매우 중요하므로 조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970년 초, 제가 페미니스트가 되었을 때 저는 『여성 혐오』를 몰랐습니다. 그 책이 출판될 즈음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찾아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안드레아 드워킨이 『여성 혐오』에 담고 있었던 사상의 소용돌이는 제가 배우고 있었던 페미니즘의 강력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그 책들을 발견했고 페미니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성 혐오』가 급진적인 이유는 이 책이 직설적으로 사도마조히즘적인 로맨스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마조히즘적인 로맨스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생산하며 남성 지배의 기반을 제공합니다.  모던/포스트모던 열풍에서 대유행하는 '당신은 젠더를 선택하고 바꾸고 기타 등등을 할 수 있다'는 류의 말과는 달리, 저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야기할 때  여성성은 여성의 종속적인 행동으로, 남성성은 남성의 지배적인 행동으로 이해합니다. 이들은 실제로 권력의 위계에서 행동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꽤 직설적으로 말하고 싶군요. 젠더는 이 용어를 아우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젠더에 관한 총체적인 생각은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여성 혐오』에서 안드레아 드워킨은 전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전족에 대해 매우 유익한 부분이 실려 있는데, 전족이 하이힐, 특히 현재 만들어지는 하이힐과 아주 유사한 기능을 한다고 언급하는 것 같습니다. 드워킨은 여성의 불구와 남성을 함께 다루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는 여성의 고통을 대단히 기뻐하며 그녀의 기형을 흠모하고, 자유를 무력화하며, 그 발목뼈를 으스러뜨리기까지 해서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서 소유하고자 한다. 잔인성, 사디즘, 그리고 억압은 낭만적인 정신의 실질적인 핵심으로 나타난다. 그 정신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문화의 날실과 씨실이다."


이것이  『여성 혐오』의 근본적인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매우 훌륭한 구절이며, 여기서 안드레아의 언어가 가진 힘을 볼 수 있지요.


그녀는 『여성 혐오』에서 아름다움은 남성우월주의 문화에서 여성을 혐오하는 하나의 측면이라고 분석하며, 여성의 죽음,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와 폭력을 비난하고,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아는 그 문화를 파괴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형태로 문화를 재건하는 대안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파괴라는 단어는 강렬하고, 좋으며, 중요합니다. 문화의 가장자리를 어설프게 손보자는 게 아닙니다. 때때로 젠더라 불리는,더 적절하게는 성역할을 파괴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여러분께 요구하는 겁니다. 성역할이라 부르는 게 더 좋겠군요. 그리고 확실히 남성성과 여성성을 파괴하는 겁니다. 가장자리를 땜질하는 게 아니라 파괴해야 해요. 그게 안드레아의 책에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요즘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오늘날 문화를 파괴하자는 류의 이야기는 예전에 비해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굉장히 보수적인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우리는 모두 온건하게 말하기를 학습했습니다. 안드레아는 그러지 않았지요.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그녀는 온건함을 거부합니다. 문화를 파괴해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1970년대 초 급진적인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던 분위기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네요.


가장 최근에 나온 저의 책 『아름다움과 여성혐오』 를 집필하면서, 서양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꾸미기 관행의 폐해와 이를 없애야 할 필요성을 깔끔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정말 찾기 어려웠습니다. 70년대 초에 안드레아 드워킨과 제가 가지고 있던 급진적인 정치학이 실제로 집필된 양을 과대평가했던 모양입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견해를 기록했지만, 미용실천에 대한 급진적인 정치학은 그의 것 외에는 실제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강경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1970년대 후반의 산드라 바트키(Sandra Bartky) 뿐이었습니다. 그녀마저 없었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겠지요. 나오미 울프의 경우 꽤나 늦게 나왔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았지만, 그 책이 급진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그 점도 논의해볼 수 있겠지요.


안드레아 드워킨은 꾸미기 관행이 여성의 신체와 삶에 광범위하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보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꾸미기 관행은 단순히 시간낭비이며, 비싸고, 자존감을 해칠 뿐 아니라 다음과 같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여성 개인이 자신의 신체를 대하는 관계를 세세하게 설명한다. 여성의 기동성(하이힐과 타이트한 치마를 생각해보자), 자발성, 자세, 걸음걸이 그리고 그녀가 몸을 둘 수 있는 곳의 용도에 제제를 가한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적 자유를 세밀하게 한정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성들이 자기 몸이 완전히 묶여 압박을 당하는데, 어떻게 상상력을 발휘하고 창조적일 수 있는지, 어떻게 머리로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는지 저는 굉장히 의아하거든요.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꾸미기 관행은 단순히 흥미로운 선택,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여성이 누구이며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데, 신체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특정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꾸미기 관행은 여성에게 심리적인 영향도 끼칩니다. 신체의 자유와 심리적 발달, 지적 가능성,창의력은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는 신체를 구속하는 방식과 연관이 있다고 그녀는 한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다른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비평과 같이, 그녀는 여성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수많은 관행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녀의 책에 있는 훌륭한 다이어그램을 보여드리지요.



이 그림은 1974년 출간된 『여성 혐오』에 실려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아름다움은 아프다’ 라 맨 위에 적혀 있지요. 분명한 사실입니다. 맨 아래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왜 여성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적이 없는가?" 그리고 "왜냐하면 그들이 아름다운 작품이니까"가 답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여성들이 스스로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그녀는 우리 문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합니다. 이 문화에서 건드리거나 바꾸지 않고 냅두는 여성의 신체부위는 한 군데도 없으며, 예술 혹은 예뻐지는 고통은 얼굴이나 손발 끝부분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머리는 염색하고, 윤기있게 하고, 쭉 펴고, 펌을 하며 눈썹은 뽑고, 그리고, 염색을 하며 눈에는 라인을 그리고, 마스카라에, 섀도우를 칠하고, 눈썹을 구부리거나 가짜 속눈썹을 붙입니다. 여성의 외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구석구석 수정과 변형의 대상이 됩니다. 이 다이어그램을 처음 보았을 때 제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기억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요.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요? 하지만 처음 봤을 때 그 그림은 굉장히 유용하다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실제로 여성이 당연시하는 것, 아침마다 스스로에게 하는 엄청난 관행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은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볼 수 있게끔 이런 관행을 세밀하게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지요.


지금은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게 된 더 해롭고 외과적인 관행을 이 그림에 보충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여기 그림을 보면 무엇을 더 채워넣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배꼽을 보석으로 장식했다는 서술은 꽤나 흥미로운데요, 1974년에는 배꼽 피어싱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배꼽 피어싱을 뜻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여성들에겐 배꼽을 내놓고 피어싱으로 뚫는 게 당연해졌습니다. 이로써 남성들은 거리를 거닐고 버스에 앉아있을때 등등 여성의 통증과 피어싱에 대해 사도마조히즘적인 만족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 여기 보지가 있습니다. 보지는 당시에 우리가 쓰던 단어였고, 그때는 그 단어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사정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보지에 탈취제를 뿌리고, 제모하고, 향수를 뿌립니다. 우리는 그렇죠, 완벽하게 면도해야만 합니다. 서양문화에서는 여성들이 털을 완전히 제거하기위해 브라질리언 왁싱을 하니까요. 1974년에는 단순히 가장자리를 약간 면도하는 수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유행하는 소음순 성형은 성형외과 의사가 여성의 소음순을 제거합니다. 여성들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말하거나 외과의사가 성관계중 질에 들어갈수있고 불편하다고 설명하기 떄문입니다. 이런,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이성애자였을때 제 소음순이 불편했던 기억은 없군요! (웃음) 어쨌든, 수영복 사이로 소음순이 살짝 삐져나올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수영복 따위는 벗지 않나요? 저는 몸을 가리는 편을 좋아해서 잠수복(웨트슈트)를 입습니다. 그러니까 꼭 소음순이 수영복 바깥으로 덜렁거릴 이유는 없습니다. (큰 웃음) 그러니까 소음순 성형술을 해야하는것입니다.


엉덩이는 거들로 받치고요. 제 자매들과 어머니가 거들을 입었던 게 기억나네요. 1960년대에 팬티 거들이라 하던 건 실제로 입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성들은 군살 없는 배를 만들려고 엄청나게 운동을 해서 몸을 관리합니다. 팬티 거들은 그닥 바람직하게 여겨지진 않지만 여전히 입는 사람들이 있지요. 가슴은 브래지어로 조이고 거기에 실리콘을 집어넣습니다. 1974년에 비해 유방임플란트 시술을 훨씬 더 많이 받고요. 유두는 착색하고, 그렇죠 십중팔구는 유두에 고리를 걸 테지요. 여성의 몸을 피어싱으로 해체하는 건 꼭 필요하니까요.


지금은 수많은 성형수술이 메이크업처럼 자행되므로 얼굴에는 아주 다른 것들이 채워질 겁니다. 여성은 근육을 마비시키려고 보톡스 주사를 얼굴에 맞는데 이는 흔한 일처럼 취급되지요. 저는 1974년에 행하던 관행, 저도 했었던 그 관행들에 대해 책에서 썼습니다.

요즘 우리가 하는 관행들은 1974년에 했던것보다 더 외과적인 것들이고, 진피에 행해지며, 피를 뽑고 그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잔인합니다.


안드레아는 이에 대해 ‘꾸미기 관행은 경제에 필수적’이라 덧붙입니다. 당연히 사실입니다. 꾸밈노동이 경제를 지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조사는 거의 없으며 ‘이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구분, 그리고 여성이 되는 가장 즉각적인 신체적, 심리적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 꾸밈노동은 성차를 만들어냅니다. 이 관행들은 아주 해롭고 고통스럽고 대단히 비싸고 시간낭비이며 몸을 구속하고 여성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니면 누가 우세하고 열세한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는 남성지배질서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그 체제에서 우리는 누가 위고 아래인지를 알고 있지요. 이것이 없으면 남성지배 체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드워킨은 이 부분을 정말 잘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현재 우리 문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을 발견했는지 비판하고자 합니다. 슬프게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성차가 없어지지 않았고, 갑자기 여성들이 자기가 어떻게 보이던지 신경 안 쓰고 민낯으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와 돌아다니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미래에는 그게 가능하기를 바랍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여성이 남성이 누리던 인권과 자유를 누리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는 것 말입니다. 그건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 학생회관 상점에서 파는 잡지에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있는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밤에 길거리에 다니는 젊은 사람들 혹은 외출하려는 사람들을 볼 때 저는 항상 깜짝 놀라기 때문이지요. 여성의 복장과 남성의 복장 사이의 극단적인 사도마조히즘적인 차이를 정말 명확하게 볼 수 있거든요. 심지어 유명인들이 나오는 잡지더라도 여성잡지는 여성에게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는 사진을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맞나요? 커플 사진을 찾았는데 아주 좋은 예는 아니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그 때 찾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파이스 걸인 모양이네요.


이제 다른 점이 눈에 보일 겁니다. 남성은 헐렁한 정장을 입고 까만 신발을 신고 당연히 입은 닫고 있습니다.여성의 입은 항상 삽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몸도 열려있습니다. 그렇죠? 굉장히 분명하군요. 입모양을 “어” 한 채로 돌아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웃음) 저는 어릴 때 <Dallas>(댈러스* 역주: 1978년부터 1991년까지 방영된 드라마)를 보면서 여성의 입은 열려 있다고 느꼈습니다. 여성은 ‘안녕 데어드레이. 아’ 하고 남성은 ‘안녕 데어드레이. 엄’ 한다는 것입니다. (웃음) 여기서 여성과 남성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앞에 서 있는 스파이스 걸은 그녀의 몸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보이는 하이힐을 신고 있습니다. 그녀가 비록 연예인이더라도 이 사진은 여성들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그리고 외출할 땐 자신을 어떻게 꾸미고 싶은지 보여주는 꽤 좋은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사도마조히즘적인 로맨스를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 기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이걸 받아들여서 분명 이상하다고 언급하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네요.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2006년인데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성은 고통을 느끼고, 완전한 불구이며, 몸을 드러내고, 제가 성적인 노역이라 부르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중세 프랑스의 농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시죠. 농노들은 자신의 땅에서 경작하기 위해 아무것도 받지 않고 지주의 땅에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게 여성들이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는 성적인 노역으로, 길거리에서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든 남성의 성적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 이런 짓을 자신의 몸에 행해야 합니다. 권리를 갖기 위해서요. 요즘 말로 하자면 사무실에서 일하고, 직업을 갖고, 세상 밖으로 나올 동등한 기회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여성들이 수행해야 할 성적 노역입니다.


다른 예시들을 봅시다. 이건 분명히 바쁘게 수다를 떠는 마돈나와 그녀의 남편이군요.




특이한 점은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평범한 사진이지만, 저는 이 사진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신발 말입니다. 사실 그녀는 그 신체를 모두 드러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아마 다리를 제모하고 기타 등등을 했겠지요. 그리고 물론 머리카락, 얼굴 그리고 표정까지 어떻게 신경썼는지는 대단히 중요하고 다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의 입은 열려 있습니다. 저는 사진사가 입을 다문 그녀를 찍고 싶어했을 거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뭐랄까, 남성도 입을 살짝 벌리고 있군요. 그래요. (웃음) 하지만 그가 삽입당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것은 여성의 독사진입니다.  




그녀와 함께 비교할 남성사진을 찾지 못했습니다. 여성의 독사진이지만 특이하다고 생각해서 이 사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저 옷을 입은 남성을 보고 싶군요!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왜 남자들은 저런 옷을 입고 저녁에 돌아다니지 않는 거죠?  만약 그런 상황이고 우리가 거기에 있다면 그게 평등해진 거겠지요. 왜 남성은 여성이 이런 관행을 선택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은 하지 않는 걸까요? (웃음) 뭐, 남자들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남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지 우리에게 답변하는 게 합리적이겠네요. 네. 이것은 지위를 떨어뜨리는 일이고, 굉장히 고통스럽고 불쾌합니다. 그래서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성형외과 의사는 성전환, 젠더전환을 하는 남성의 몸에 젠더를 자르고 새기는 일도 합니다. 그리고 같은 외과 의사가 여성의 소음순을 잘라내고 젠더를 바꾸는 남성에게 여성의 소음순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것들을 제공하는 웹사이트도 있습니다. 의사들이 해 주려는 것들은 더욱 더 끔찍해지고 나중에는 추측하건데 수요가 있으면 사지절단도 해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대다수가 남성, 아마 게이 남성인 신체 정체화 장애(BIID)는 팔다리를 절단하고 싶어하는 질환으로, 일부는 쿼드(quad)가 되고 싶어서 사지를 모두 절단하고 싶어합니다. BIID 웹사이트를 보면 그 사이트에 글을 쓰는 외과의사와 정신과의사는 성전환 수술도 하며, BIID를 미국 DSM(정신질환 진단 및통계 편람)에 포함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합법적으로 다리를 절단할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스코틀랜드의 외과의사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건강한 두 남성의 다리를 제거하였습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제가 말하고 있듯이, 결과적으로 성형외과 의사들이 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파괴적인 수술에는 그 한계가 없습니다.


『여성 혐오』에서 잘 드러난 꾸미기 관행, 이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거부에 공감해서, 저는 1973년부터 그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거부하게 된 것은 1970년~ 71년에  『성의 정치학』과  『여성, 거세당하다』 라는 두권의 책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그 전에 저는 얼굴을 덮을 정도로 길고 곧은 머리를 유지했거든요. 사람들이 제 얼굴을 보는 걸 원하지 않았고, 머리는 중간 톤의 황금 모피색으로 염색했습니다. 수많은 색상의 눈화장품, 가짜 속눈썹 등등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화장품을 썼습니다. 겨드랑이와 다리를 제모했고 하이힐도 신고 온갖 것을 다 했어요. 저는 이성애자였고 성적 노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안드레아 드워킨도 당연히 꾸밈노동을 거부했는데, 명예훼손자들은 항상 그녀를 비웃는 주된 방식 중 하나로 이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성역할(현재는 젠더)과 여성성을 거부하기로 한 평생의 결정은 늘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완전히 여성성을 거부한 미국 페미니스트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른 방면에서 그들이 중요한 공헌을 했을지라도, 그들은 안드레아가 그 생애를 통틀어 했던 것처럼 완전하고 직접적으로 여성성을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상적 통제를 통해 주입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에 사회적, 정치적 요구사항이 새겨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올바른 젠더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신체적 요구사항은 여성의 가슴, 음순, 입술 그리고 여성이라고 결정한 남성의 신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야만적인 관습은 우리가 보다 엄격한 젠더 체제 아래에 살고있다는 암시입니다. 젠더와 관련된 수많은 방면에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젠더라는 새로운 체제 하에 살고있습니다. 1970년대 드워킨이 글을 쓸 당시, 젠더라는 단어는 흔히 사용되지 않았고, 그녀는 성역할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저는 그 단어를 더 선호하는데 행동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사회학에서 비롯된 직설적이고 좋은 단어입니다. 1990년대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기존의 성역할을 대신해 젠더란 단어를 채택했습니다. 성역할이란, 소년과 소녀가 선택할 것으로 사회화된 사회적으로 구성된 행동으로 성별 계급 분류에 걸맞는 양상을 띱니다.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더 나아가 젠더가 어찌되었든 남성과 여성이 ‘젠더체계’ 혹은 ‘젠더관계’라는 권력관계에 얽혀 있다는 사상을 포함하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했습니다. 그건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젠더’라는 단어를 결코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


페미니즘과 아주 다른 정치적 입장, 많은 경우 안티페미니즘에서 젠더란 단어의 ‘개념을 전유’했다는 점이 금방 명확해졌습니다.  90년대에 젠더학은 여성학을 대체하고 서점에서 젠더학 부분이 여성학을 대체하였습니다. 한편 ‘젠더’는 개념 전유로 완전히 변질되어 50년대에 성과학자들이 쓰던 기존의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성과학자들은 성별을 횡단한다는 의미로 젠더를 설명했습니다. 50년대 트랜스젠더를 연구하던 성과학자들은 실제로 그 단어를 사용했고, 생물학적인 기반을 제공했으며, 남성과 여성의 정신에 생물학적 기질이 있어 그들이 올바른 젠더 행동을 배우거나 혹은 배우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요즘 그들이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방식은 증명할 방법이 없으며, 증명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이어야 합니다. 태아가 자궁에서 어느날, 아마도 어느날 아침, 갑자기 폭발적인 양의 호르몬을 받아서 그때부터 그 사람은 다른, 잘못된 젠더를 가졌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증명할 수 없지만, 이는 오늘날 트랜스젠더리즘의 생물학적 기반으로 간주됩니다.


'젠더'는  섹스의 대체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이 섹스를 생물학적인 것으로, 젠더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아도 결국에는 '젠더'가 섹스를 대체하게 되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지는 알 겁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작성하는 양식에는 오른쪽에 f혹은 m에 체크하게끔 한 젠더 표기란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물론 우리 대부분은 젠더를 가진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으니까 체크 못하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네, 알다시피 언제 아내를 그만 때릴 거냐고 들은 상황, 즉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강요받은 겁니다. 정말로, 젠더를 부여받을 때 제 대답은 "아니오, 괜찮습니다(웃음) 그런데 저는 그 양식을 채울 수가 없네요, 됐습니다."입니다.  현재 젠더가 섹스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므로 젠더는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변화되었습니다.


젠더 개념이 채택되면서, 트랜스젠더-원래는 트랜스섹슈얼이라 부르던-운동이 발전했습니다. 이 운동은 90년대에 트랜스젠더리즘이 되었고 더욱 보편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어떤 퀴어/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트랜스젠더리즘이 복장도착증의 여러 유형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복장도착증이란 실제 트랜지션과 성전환수술뿐 아니라 대개 트랜스젠더리즘을 유도합니다. 7-8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자유를 추구하고자 성역할을 없애야 할 것으로 취급한 반면, 트랜스젠더들은 자신들의 즐거움과 그 정체성을 위해 전통적인 젠더 개념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트랜스젠더들은 젠더가 비판받지 않게끔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제가 ‘젠더 보존 운동’이라 부르는 것에 관여하며, 서구 국가에서 법을 제정함으로써 젠더 보호업에 참여합니다. 맞나요? 젠더 보호업의 가장 좋은 예는 2004년에 영국에서 제정된 젠더인정법(Gender Recognition Act)으로,  조금 있다가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젠더는 사용이 제한되어, 트랜스젠더리즘의 맥락에서는 여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2005년에 Pluto Press에서 출간한 수리야 먼로(Surya Monro)의 책  『젠더 정치학』(Gender Politics)이 있는데, 그 책은 수리야 먼로가 비트랜스 여성이라 칭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지 않아요. 여기 계신 대부분의 여성분들은 십중팔구 비트랜스 여성이라 불릴 겁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를 바이오 여성이라 하더군요. 트랜스젠더리즘이 사실상 실제 여성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만듦에 따라, 트랜스젠더가 아닌 여성은 여성이란 이름 앞에 접두사를 붙여야만 합니다. 그 접두사는 비트랜스 내지는 바이오가 되겠고요. 안녕하십니까, 바이오-여성들! (웃음) 그 책은 여성을 설명하지 않지만 제목은  『젠더 정치학』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사도마조히스트와 페티시스트의 권리를 인권의 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마조히스트와 페티시스트들의 인권은 다뤄져야 하지만, 여성은 그 책에 없네요. 이것이 『젠더 정치학』이라 불리는 책의 전부이며, 여러분은 젠더가 여성을 유익하게 하는 것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젠더 보호업’ 은 젠더 인정법이라는 이상한 법 제정을 초래했습니다. 그 법안에서 젠더는 마치 생물학적 성별과 동일한 것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이 법은 남성 혹은 여성이 젠더 심사 위원회에 출석하여 젠더 변경 인증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수술이나 호르몬치료를 요구하지 않으며, 이 사람이 반대 성별의 옷을 입고 삶을 살 수 있다고 증명하는 의사의 진단서만 요구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결과 중 하나는 ftm 성전환자, 즉 남성성에 관심있는 레즈비언은 이름이 앤드류라는 인증서를 받고도 아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부인과에서 우리가 앤드류를 문 저편으로 들여보내면 앤드류는 아이를 낳을 겁니다.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은 앤드류가 아이의 출생증명서에 아버지로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그들은 그렇게 바랍니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왔습니까. 이와 같은 미친 요소들이 이 법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골때리는 것들 중 하나는, 하원에서 이 법안에 대해 토론하는 걸 봤을 때, 제가 동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우익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제가 가장 동의하는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마냥 기뻐하지는 않을 것 같은 노만 테빗Norman Tebbitt입니다. 그는 젠더 인정법에 대해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젠더 인정법에 대해 그는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아주 좋은 정의를 제시하고, 그 법안에서 당신은 젠더로 적어 놓았는데 그건 섹스여야 한다며 헷갈리게 적어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로드 필킨(Lord Filkin)은 섹스와 젠더는 같은 것이며 그게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냐고 했고요. 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테빗은 그의 언어 상대론을 비난했습니다. 어느 쪽을 제가 더 좋아할까요. (웃음) 제가 했어도 그렇게 잘 설명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테빗은 트랜스젠더리즘의 잔인한 자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영국문화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일어났다면, 해로운 문화적 관습이라고 말했을 텐데, 어떻게 우리가 영국 제도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느냐고요. 그는 이 모든 주장을 극우익에서 했는데 저로선 꽤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말해야겠네요. 소위 말하는 진보 좌파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리즘의 인권침해와, 그 법 제정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법안은 모두를 미쳐버리게 합니다, 맞습니까? 이제 모두들 이 법안을 이해하거나 대응하기 위해 미쳐야 합니다.


좋습니다. 제가 이 새로운 젠더 체제, 이 잔인한 체제에 대해 걱정하는 건 우리가 모두 젠더 심사 위원회에 출석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이 법안에 대해 「눈으로 보면 알게 되겠지, 젠더 인정법」(They’ll know it if they see it, The Gender Recognition Act)이란 논문을 썼습니다. 젠더 심사 위원회에 출석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국가에서는 항상 성별을 규정해 왔지만 이제는 젠더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제가 위원회에 출석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할까요? ‘됐어요’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국가와 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전통적이고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젠더를 규정해버리는 꽤나 극적인 시대에 우리는 도달했군요.


네, 빠르게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왜 모든 관행, 트랜스젠더리즘의 관행과 그런 법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 이는 서구 문화권과 아마 모든 문화에서 매우 뿌리깊은 이해 때문일 것입니다. 젠더라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결코 없앨 수 없는 것이라는 그런 이해 말입니다. 필연적인 생물학적 성차가 존재하여 그게 껑충껑충 뛰어서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가든지 말든지 젠더가 머무르는 한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젠더를 극복하고 이를 없애서 모든 여성들이 현실적인 삶을 살게 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 드워킨의 작품과  『여성 혐오』의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는 말했지요. “우리는 알다시피 문화를 파괴해야만 합니다.” 젠더를 이상한 법안, 끔찍한 절단 수술과 호르몬에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젠더 체제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파괴당한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요.


제가 하려던 말은 다 제쳐두고, 마지막으로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안드레아 드워킨의 작품은 제가 정상이라고 느끼게 합니다. 젠더의 폐지를 위해 일하는 것, 어설프게 수정하는 게 아니라, 폐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또한 페미니즘이 다시 부흥할 것이란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1974년을 돌아보면서, 이 축하 행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안드레아 드워킨의 작품에 관심있는 젊은여성들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주) 쉴라 제프리스가 연설 중 보여주었던 사진들이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이 사진들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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