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자: Anonymous author
역자: Team Hermes 김예나
원제: Political Lesbian Myth Busting
원문 출처: 링크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정체성’이 아니다. 이는 퀴어들의 헛소리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우리와, 우리의 자매들이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로 인해 받아온 피해를 이해하는 하나의 과정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깊이 상처 입히는 시스템들에 영향 받지 않고, 다른 여성들과 경쟁하고 그들을 불신하는 대신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개인적, 정치적 수준의 인식이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순수한 성적지향(당신이 어떤 대상에게 매력을 느끼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별 대단치도 않은 이성애의 표면적 모습과 그것을 즐김으로서 얻게 되는 이득을 유지하면서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도용하기 위함 또한 아니며, 비록 그것을 위한 첫 발자국이 될지언정 그 자체로 가부장제를 파괴하기 위함도 아니다. 많은 여성들은 잡음 없이 급진페미니스트의 길을 걷는 것이 더 수월한 것을 안다. 많은 여성들은 그들을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체계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을 통해 그것과의 충돌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한다.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통해서 그들이 여성을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함을 발견해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유일하게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을 억압하는 자들과 함께 살도록 억압한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정치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기 어려워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계속해서 살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적인 진실로부터 눈을 돌려야 하기에 우리의 정치적인 판단력은 필연적으로 흐려진다. 우리가 가부장제 하에서 우리의 진실에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의 제약을 떨쳐냈을 때뿐이다.
온라인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급증에 따른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저항;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저항은, 수년 전부터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표용한 우리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특히나 그 저항과 적대가 최근의 젊은 여성들이 실생활에서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진행을 발견해내는 배경에 짙게 퍼져있다는 점이 그렇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발전을 통해 ‘벽장을 나온’ 대부분의 여성들은 래디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혹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직접 만나고 그들과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 감정적으로 연결되면서 그렇게 된다. 온라인 정치 활동은 거의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존재를 포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성 의식 함양을 통해 고찰할 수 있는 개인의 실제적, 체험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젊은 여성들 중 몇몇은 ‘커밍아웃’을 두려워하거나 그들의 감정이 어딘가 ‘허위적’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설득된다. ‘커밍아웃’을 결심한 레즈비언들에게 아무 이유 없는 환영과 인정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불행히도, 넷상에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이론과 연대하여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이해 없이 그것을 그저 ‘도용’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모욕적인 죄를 저지르는 행위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 ‘트랜스 논쟁과 다를 바 없다-내가 레즈비언이라면 나는 레즈비언이야’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발전에 대한 터무니없는 이해일 뿐만 아니라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성적지향의 구성을 잘못 분석하는 것이다. 요는 ‘진짜’ 레즈비언과 그것을 ‘도용’하는 가짜 레즈비언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이성애가 우리를 억압하는 주된 요인이며 이성애의 식민지화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우리에게 개인으로서도, 여성 전체로서도 이익이라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분석을 무시하는 것이다.
몇몇 동성애 회의론자들은 우리가 왜 레즈비언 문제는 ‘순수한’ 레즈비언들에게 맡겨두고 여성들을 순결주의로 ‘회의’하지 않는지 묻는다. 위와 같은 질문은 성적지향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낸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회 구성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성적 욕망은 인간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는 지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을 드러낸다. 많은 이성애자 여성들은 이성과 결혼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취함과 동시에 섹스리스 부부로 살아간다. 스스로 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레즈비언언들이 레즈비언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반-가부장제적 '커밍아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순결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관계를 성관계의 유무를 통해 정의하는 꼴이다. 성의 사회적 구성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주제가 논란이 될 때마다, 몇몇 나이 많은 레즈비언들은 확실하게, 이성애자 여성들이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정체화 하더라도 결코 여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경험을 통해 확신한다. 그들은 이성애자 여성들이 마치 부적절한 정치적 충성을 바치는 것 마냥 행동할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정의하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 내 정치적 의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나는 지금까지 위와 같은 의견에 접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혹은 그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단지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발전에 대한 오해일 뿐이었는지 궁금하다. 누가 아는가? 래디컬 페미니즘이 그에 대한 미신으로 인해 발목 잡힐 수 없듯이, 만약 이들이 여성들이 ‘진짜’ 레즈비언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걱정해 ‘커밍아웃’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레즈비언의 삶에서 성생활이 차지하는 부분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염려되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이성애자 여성들은 활발한 성생활에 대한 압박을 경험했다. 우리는 모두 섹스가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섹스를 제외한 관계는 ‘진짜’가 아니라고 믿어왔다. 몇몇 노인들은, 대개, 활발한 성생활을 가진다. 그들은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레즈비언들 역시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레즈비언이 되기를 멈추지 않는다. 순결을 지키는 나이든 사람들은 그들의 성적지향에 대해서 계속하여 질문 받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이성애자로서 생각되어진다. 누군가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레즈비언이 되는 것에 대한 정의로 연결되면 안 된다. 레즈비언이 되는 것은 성행위와 커뮤니티, 문화 전부의 사회적 구성이다. 보통 처음에는, 많은 레즈비언들이 성적인 표현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한시도 쉴 새 없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성애자 여성들은 온라인상에서 몇몇 레즈비언들의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적개심에 동감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발전이 도용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따라서 그들은, 만약 세상에 레즈비언 밖에 남지 않게 된다면, 고맘기 그지없게도, 그들은 당연히 섹스리스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예전’의 레즈비언들은 그러한 주장에 반박했겠지만 근래의 레즈비언들은 컨셉에 따라‘섹스하기’바쁠 뿐이다.
현대의 성에 대한 논의는 –설령 그 논의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분석 방식에 따르지 않는다. 논쟁의 기본에 깔린 바탕은 성적 지향이 타고난 것이며 우리는 성적으로 ‘이렇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수용되는 유일한 여성에 대한 억압 요소로, 피할 도리가 없다.
[‘이성애’가 이미 설치되어 있어 ‘레즈비언’을 설정할 수 없습니다.
수동 설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습니다.
아무도 나갈 수 없습니다.]
사실, 사회적 구성으로서의 성적지향은, 단순히 우리가 인생의 한 지점에서 누구에게 끌리는가에 대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다. 마치 찍어내기라도 한 듯이 남성 전체의 이익과 여성 전체의 억압을 위해 일상화되어 있으며 구조화되어 있다. 여성들은 가정에서 무임금 노예와도 같고 이성애에 대한 문제 역시 이에 포함된다. 근래에는 많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성교’(흔히 PIV –Penis in vagina 라고 부른다.)와 이를 바랄 수 있고 실현 가능한 단 하나의 성행위로 받아들이도록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성들은 스스로의 안녕과 즐거움을 희생하게 된다. 포르노매춘(포르노그래피, 성적인 의도로 매매된 여성들), 성적인 위협에 대한 불안감, 성희롱, 가정 폭력 들은 모두 직, 간접적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비인간화하며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의 신체를 객체화하고 그들의 소유로 여기게끔 억압하고 강압한다. 노예를 만들기 위한 억압과 강압의 더욱 미묘한 형태는 ‘당신에게 맞는 남성이 어딘가에 있다’는‘동화 속 왕자님에 대한 환상’과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부터 배우는 온갖 유명한 세뇌들이다. 여성의 필요와 욕망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요되고 강압된 성적 굴복은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가정의 노예가 되길 바라도록 하는 초석이다.
따라서 여성이 성적으로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평생을 노예로 묶여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수십 년 동안 많은 페미니스트를 만들어내는 기폭제였다. 삶의 다른 모든 요소들과 같이 성적 지향이 정치적 인식과 함께 움직이고 변화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성적지향이 선천적이고 고정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일어난 혁명이었다. 만약 우리가 남성에게 성행위를 개선할 것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더욱 개방적인 성적 욕망을 가지도록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인터넷에서 꽤나 만연하게 퍼져있는 또 다른 미신이 있다. 이는 그것을 믿는 소수파들의 엄청난 량의 글에 의해 입지가 확고해져가고 있다. 이는 바로 그렇게 태어난 레즈비언 (혹은 언제나 레즈비어니즘을 채택해온 여성)들이, 그것이 이유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그녀가 이성애적 체험에 대한 압력을 평생 거부해왔기 때문에,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의 족쇄로부터 자유롭다는 의견이다. 몇몇 페미니스트가 아니면서도 그렇게 태어난 레즈비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져보았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다른 여성들과 다름없이 여성 혐오와 자기혐오에 빠져있었으며 추가적으로 그들이 레즈비언이 아닌 선택지가 없다고 믿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너를 사랑하고 싶지 않지만 스스로가 제어가 안돼”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은 딱히 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이성애주의의 진부한 원칙들; 예를 들면 사귀는 사이에 내가 섹스를 원할 때 상대방에게 섹스를 빚진다고 생각하는 등 을 흉내 내려고 할 뿐이다. 이 주제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결코 아무도 내부화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여성이나 여아들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결코‘프리 패스’ 카드가 아니다.
막간을 이용해 잠시 또 다른 미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번 미신은 정치적 발전을 통해 레즈비어니즘을 발견한 이들은, 순수하게 그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과 달리, 꽃길을 벗어나 ‘남성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스스로를 이성애자나 양성애자로 재 정의한 여성들의 배경을 볼 때,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 다른 방식보다 이성애주의를 양산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말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나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 그렇게 뿌리가 깊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다. 성적 체험에 정치적인 생각보다는 진심으로 가치를 메겨야한다는 주장은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봤을 때 굉장히 의심스럽다.
요컨대 나는 레즈비언들이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왜곡하고 그것에 대해 반박하는 것을 멈추길 바란다. 이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은 이것이 얼마나 좌절스러운 일인지 알아야한다. 또한 나는 이성애자 여성들이 레즈비언들이 같은 여성으로서 그들의 개인적인 정치적 위치를 지지해주길 바라는 것을 멈추길 바란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라는 개념에 노출되는 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 많은 전(前)이성애자 여성들은 우리들의 삶이 우리들로 하여금 풍부해져야 한다고 느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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